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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돌

웃는 돌

명상하는 돌 

 - 노준진의 석조각 읽기



김종길 | 미술평론가



인류가 최초의 조각적 행위를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다. 구석기인들의 석기문화는 그것이 다소 거칠고 문명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할지 모르나 사실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또한 매력적이다. 그들은 ‘두리새김’과 ‘돋을새김’의 조각 형식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조각은 회화에도 적용되어 생동감이 넘치는 벽화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때의 조각은 동물형상이나 인체가 주를 이뤘다. 돋을새김이후에는 선영線影의 날씬한 조각이 나타났고 그것은 선화線畵로 발전되었다. 

수 만 년 전의 예술가들은 동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새겨 넣음으로써 사실주의에 도달했다. 그들의 사실주의는 현재와 같은 미적인 경향이나 개념이 아니다. 원시 벽화와 조각을 연구했던 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주술적인 맥락에서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거나 형이상학적인 어떤 상징물로 해석되는 ‘사실성’이다. 그러므로 구석기인들이 만든 동물형상의 사실적 표현은 단순히 어떤 동물에 대한 재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동물들은 그들의 토템totem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애니미즘animism적인 종교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준진의 조각은 인류가 오랫동안 수행해 왔던 조각의 원초적인 미술행위를 느끼게 한다. 구석기인들이 돌을 만지고 다듬으면서 돌의 생명력을 예지했던 마음과 큰 차이도 발견하기 힘들다. 오래전의 인류는 돌을 돌로 다뤘던 것이 아니고 ‘돌’이라는 응결된 자연성을 채굴하려 했다. 그들이 돌에 하나의 선을 긋는 순간은 돌에 갇힌 지구의 혹은 우주의 숨결을 트는 행위였을 것이다. 노준진이 돌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조각을 하기 위해 일부러 딱딱한 물성의 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돌은 돌이 탄생한 순간으로부터 지금 여기에 이르는 시간까지 수많은 시간의 결을 품에 안았다. 아름다운 사계와 숲, 바람, 계곡, 강의 세찬 물결, 해와 달, 그리고 온갖 짐승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돌은 무수한 시간을 구르면서 자신의 육체를 달구질하지 않았겠는가! 노준진이 추구하는 돌조각도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돌이라는 자연, 돌이라는 자연의 얼굴, 돌이라는 그 실체적 영성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돌의 자연성을 쉽게 토템이나 애니미즘으로 부르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의 조각이 원시 조각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돌에서 신비한 종교성이 아닌 하나의 조각적 덩어리로서 돌에 내재된 자연의 형상성을 찾는데 주력해 왔다.


그는 조각을 하기 전의 순수한 돌을 바라본다. ‘순수한 돌’은 아무 것도 없는 돌 그 자체의 형상이지만 조각가에게 그것은 모든 형상을 담지한 돌이기도 하다. 돌이 어떤 과정, 어떤 시간을 거쳐 그 앞에 서게 되었는지에 따라 교감은 달라질 수 있다. 아마도 노준진은 돌의 생김과 색, 질감에 따라 다양한 형상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돌은 보란 듯이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을 것이다. 그는 이제 그 ‘속내’의 형상을 찾아 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시대의 현대적 춤꾼 홍신자는 인도의 한 강가에서 ‘웃는 돌’을 만나 자아를 깨우쳤다. 그 이후로 그는 오랫동안 무대 위에 돌 하나를 놓고 춤을 췄다. 웃는 돌과 홍신자의 춤은 기이하고 낯선 하모니였으나 서구인들은 그들의 세계 밖에서 건너온 이 춤꾼에 열광했다. 선사禪寺의 마당에 놓인 돌은 침묵하는 자아이며, 현실의 시간을 초월하는 우주적 시간, 대자연의 시간을 표상한다. 돌과 명상은 이승의 질서 가장 안쪽에서 첫 파동을 시작한다. 그것은 고요한 폭풍의 눈과 다르지 않다. 거대한 나무가 자라는 속도를 사유해 보라. 한 세기의 문명이 피고 지는 동안 주목나무는 겨우 1센티미터의 키를 올린다. 구루는 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노준진이 돌에서 찾아 낸 ‘거북이’들이 속도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큰 울림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거기에 있다. 그는 돌에 부분적인 손질만을 가해 거북이를 끄집어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는 돌 속에 사는 거북이들을 불러냈다. 그의 거북이들은 시간의 수레 같기도 하고 바퀴살 같기도 하다. 거북이들은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노준진이 추구하는 조각적 세계는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동시대 미술과 다른 곳에 위치한다. 그는 미학적 진보를 꿈꾸거나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선 예술가이기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의 조각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고, 그 과거는 더 먼 과거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고자 하는 것이다. 거북이에서 시작된 형상들이 다른 동물 형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들’의 초상에서 인간의 초상을 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파괴자의 얼굴로 돌아서는 인간의 초상은 그들 앞에서 가장 초라하다. 그들은 곧 자연의 얼굴이지 않은가!

그런데 몇 몇 작품들은 그가 의도하는 바와 다른 쪽에 있는 듯 하고 때로는 조각적 대상으로 전락한 동물의 초상도 엿보인다. 그가 재현해 놓은 조각들이 그저 조각의 대상에 그친다면 여느 동물 조각들과 하등 다를 게 없을 터이다. 뿐만 아니라 굳이 돌이라는 재료를 써야 하는 가에 대한 명분도 상실한다. 그것은 기념비적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그가 돌에 대한 더 근원적이며 심리적인 사유를 갖기를 바란다. 애초에 그가 돌을 선택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자연과의 교감에 더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래야만 그의 조각들이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돌, 웃는 돌, 명상하는 돌, 깊어지는 돌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그가 첫 개인전에서 보여주었던 작품들에 그런 돌의 성격이 표현되어 있다. 그 느낌, 돌의 소리를 놓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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